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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물 [제1화] 유럽 물류 산업의 발달

등록일AUG 16, 2021

[제1화] 유럽 물류 산업의 발달
안녕하세요?
앞으로 Cello Square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류 이야기”를 연재하게 될 삼성 SDS 상임고문 최덕림입니다. 이번 호부터 해운 물류에 대한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형식으로 격주로 게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주 “유럽 물류 산업의 발달”에 대한 포스팅을 필두로 “유럽 국가별 물류 환경”, “유럽 포워딩의 발달”, “해운시장의 흐름과 전망”, “IMO의 환경 문제 대두가 해운 시장에 미치는 영향”, “Digitalization이 해운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주제로 해운에 대한 이야기를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해운에 대한 궁금했던 점이나, 알고 싶은 점이 있으시면 컨텐츠 하단 “문의하기”로 질문 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심성의껏 대답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충성

자 이제부터 “유럽 물류 산업의 발달”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류 관련 회사를 다니거나 평소 물류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 물류의 정의나 개념 기능 등등 책에 나오는 딱딱하고 원론적인 얘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사실 해운회사 출신이라 해운물류 외에는 전반적인 물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류 이야기라기 보다, 제가 아는 해운 관련 여러 이야기 속에 물류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럽의 물류 산업의 발달, 지금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여러분 “유럽”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왓?


아마도 사람마다 “유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서로 다를 겁니다.
“유럽” 하면 생각나는 단어 한 가지씩 여쭈어보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옵니다.
몇 년 전 저의 몇몇 지인을 대상으로 질문을 해 본 결과 그 대답은 “여행”, “예술”, “역사”, “부자”, “파리”, “EU”, “선진국”, “독일빵”, “로마”, “개선문”, “2차 세계 대전”, “모짜르트”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유럽의 이미지에 대한 키워드들이 나왔습니다. 그만큼 한국인을 포함한 세계인들이 유럽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반면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한 첫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K-Pop을 비롯한 대중문화가 38%가 나온다고 합니다. 응답 중에 ‘삼성’이라는 답변도 종종 있었다는 광고 아닌 광고도 살짝 올립니다. 죄송……!

하핫 죄송



30여 년 전 한국의 30여 년 전 한국의 첫 이미지를 생각하면, 다행히도 지금은 한국의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죠.
하지만, 유럽에 대한 키워드를 30년 전에 조사를 해도 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류 이야기에 왜 이런 이미지 이야기를 하냐고요?
유럽은 그만큼 안정적이고 변화의 속도 느리며, 세월이 지나도 이미지의 변화 또한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유럽의 물류의 발전을 논하려면, 기원전부터 따져 보아야 어떤 물류의 변화가 있었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좀 과장을 했나요?

첫 회라 제가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꼬꼬물”의 특성상 이런 양념도 넣어 주어야 한다는 제작진의 요청에 충실히 응했을 뿐이니 너무 책망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자 지금부터 원고의 속도를 내겠습니다.

가즈아

유럽의 물류산업은 흔히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원전에도 교역이라는 것이 이루어졌고, 교역이 있는 한 물적 유통을 위한 갖가지 수단이 이용이 되었겠지만, 무역업이 체계적으로 발달되고 국제 간의 규모 있는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가 11세기 이후라 근대적 의미의 물류 역사의 원년을 11세기라 보는 견해가 많아 11세기부터 물류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되었다고 간주하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저만의 주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유럽의 물류인들이 인정하는 유럽 물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1세기 이전에는 십자군 전쟁,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 등으로 유럽의 산업이 발달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11세기부터는 장인의 등장과 길드의 발달로 공업과 상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한 때라 국가별로 해운업, 운송업, 창고업, 하역업, 주선업 등 각종 전문 물류산업이 태동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11세기 중순부터 14세기 초까지 250년 동안 유럽 인구는 3배나 증가를 하였다고 하네요. 먹고 살만하니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요. 사실 14세기 이후 흑사병으로 유럽의 인구가 다시 감소하긴 했지만.

시무룩


이 시기에 상공업자들의 연합인 Guild가 발달되며, 한자(HANSA) 동맹이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 발트해, 덴마크 등 북유럽 여러 국가에서 형성이 되었는데 독일 북부의 작은 도시인 뤼벡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습니다. 뤼벡은 필자가 오랫동안 주재 생활을 하던 함부르크에서 70 Km 떨어진 인구 20만의 중소 도심지라, 그곳이 중세 상공업을 주름잡던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였다는 것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자(Hansa : 한문의 한자는 절대 아닙니다)는 독일의 함부르크, 뤼벡, 브레멘 (Hamburg, Lubeck, Bremen) 등을 커버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14세기 말부터 흑사병의 창궐이 되었지만, 14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지역에 대형 도시가 발달을 하고, 특히 지중해 무역이 급격히 발달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중해 지역은 이태리, 포르투갈, 스페인, 남프랑스 지역 위주로 일찍부터 무역이 발달되었는데,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영국, 독일, 네덜란드, 플랑드르, 프랑스 등 북유럽 국가와의 교역이 본격화되고 터키 레바논까지 교역이 확대되어 대형 무역국들이 본격적으로 탄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여기서 여러분들은 시리아 아래에 있는 조그만 레바논이 지중해 무역에 무슨 역할을 하였겠냐고 하겠지만, 예로부터 베니스 상인과 함께 레바논 상인들은 지중해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멋져..!


지금도 서아프리카를 가게 되면 각 나라마다 도매 상권을 레바논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도 서아프리카 각국을 돌며 레바논 인과 인도인의 상권 장악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굵직한 산업들은 프랑스와 영국 중심의 대기업이 장악을 하고, 최근 몇 년 전부터 건설, 항만, 석유 산업들은 중국인들이 깊게 침투를 했죠.
레바논 얘기로 돌아가서 여러분은 레바논의 이미지를 내전으로 얼룩진 약소국가, 그리고 가끔 침대축구를 하는 나라로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풍부한 음식, 아랍국가이면서도 국민의 40%가 기독교를 믿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 아름다운 레바논 베이루트항에 큰 폭발 사고가 작년에 일어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레바논 베이루트항에 큰 폭발 사고가 작년에 일어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 레바논시 삼천포항에서 잠시 탈출하여 14세기 물류 환경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이때에도 물류업이 보다 세분화와 고도화되어 창고업, 유통업, 하역업 등 전문 물류 산업이 급격히 발달을 하였습니다. 언급하였듯이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감소를 했지만 역설적으로 물류업의 급성장이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컬 하긴 합니다. 마치 현재의 코로나 상황에서도 해운 물동량이 증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네요.

데헷

대항해 시대인 16세기부터는 유럽만의 근해 무역과는 달리 품목의 다양화와 장거리 운송에 적합한 선복이 다량 건조되어 과거와 다른 규모의 무역거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른바 원양 무역의 시대가 열리고 무역 및 국제 물류의 시대가 전개가 된 것이죠.

18세기부터 이후 식민지 개발이 본격화되어 각 유럽 국가마다 식민지 무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인도, 아프리카, 중국, 인도차이나 등 많은 식민국가로부터 물적 이동이 대규모로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물류업의 세분화가 고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식민지를 통한 무역량도 천문학적으로 늘어 전문적인 창고업, 하역업, 복합 주선업, 관세사 등 근대 물류산업의 형태가 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는 선주가 배만 한대 띄우면 돈을 긁어 모으는 시기였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도 인천에 배만 들어오면 형편 풀린다는 말이 있듯이…… 영국은 인도 지역에 공식적인 식민 통치 이전에도 1757년부터 플라시 전투 이후 사실상의 인도(당시 무굴제국) 식민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 면화나 아편을 재배하게 했고, 차나 향신료를 수입을 했습니다.

차나 후추의 수입으로 영국 내에서는 당시 생산지 원가의 50배 이상으로 판매를 하였는데, 당시의 선박 기술로는 감항성의 문제로 영국~인도 출항 선박의 70%밖에 살아 들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높은 소비자 가격에 선원들의 목숨에 대한 Risk Cost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하여튼 물류 산업의 발달로 이들 선주와 무역업자 그리고 관련된 물류업자, 세금 관련 관계자 등에게는 기회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특히 18세기 철도의 발달과 함께 유럽의 물류 회사들은 철도 Consolidation과 함께 대형 국제 포워딩 업체의 출현이 가능해졌고, 이들을 통해 유럽의 물류 산업이 정점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컨테이너 발명 이후 상품 용기의 규격화와 표준화 대형화 자동화 신속화가 이루어졌지만 당시의 상품들은 용기가 규격화되지 않아 보관과 하역에 큰 애로가 있었습니다.

철도의 발명으로 물류사들은 철도 웨건 단위로 한량씩 Charter를 하여 이른바 Consolidation 서비스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지금의 컨테이너 LCL 서비스를 하듯이 소량의 카고를 적입하여 많은 이익을 창출하였죠.
이를 바탕으로 18세기 말에 International Forwarder인 Danzas, Kuhne+Nagel, Schenker 등의 유럽 국제적인 포워더들이 태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유럽의 포워더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하게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풀어 버리면 꼬꼬물 밑천이 바닥나 버려 연재를 오래할 수 없거든요. 책에서 접할 수 없는 얘기니 재미로 접하던 상식으로 접하던 잘 읽고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받아랏


철도의 발달과 함께 비약적인 발달을 거듭한 이들 물류산업은 20세기 중반 우연한 기회에 발명된 컨테이너라는 용기의 등장으로 또 한 번 도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고 벌써 원고 분량을 초과했습니다. 어쩌죠! 할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컨테이너의 발명에 대해서도 다음 호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곧 뵙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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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o Square 최덕림 고문 Cello Square 최덕림 고문

유럽에서 13년 주재근무를 하면서
유럽의 각종 세계 해운 환경 Forum과 Conference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가하여,
한국보다는 유럽 해운 물류계에서 알려진 글로벌 해운 전문가

  • (현) 삼성 SDS 상임고문
  • (전) 한진해운 상무
  • (전) 현대상선 상무
  • (전) 사단법인 함부르크 경제인 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