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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컬럼 물류신문 RFP에 담긴 물류 자동화의 ‘새로운 기준’은?

등록일2026-04-15

출처 : 물류신문, 허지선 기자 2026. 4. 1

다수의 자동화 RFP 분석해보니...'속도' 넘어 '생존 설계' 요구

국내 유통업계의 물류센터 자동화 프로젝트가 대형화·고도화되면서 설비 도입을 위한 제안요청서(RFP)에 담기는 설계 조건들이 전례 없이 정교해지고 있다. 단순히 얼마나 빠르게 분류하는지 따지던 속도 경쟁의 시대는 지났다.

최근 본지가 물류 자동화 도입을 위해 유통 기업들이 SI 및 설비 업체들에 발송한 다수의 RFP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업계의 요구사항은 하드웨어 스펙을 넘어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대한 대응력, 시스템의 회복탄력성, 그리고 장기적인 운영 안전성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1분의 지체도 허용하지 않는 타이트한 리드타임 설계부터 연쇄 장애를 막기 위한 소프트웨어 모듈화, 10년 이상의 부품 공급 보증에 이르기까지. 최근 기업들이 자동화 파트너에게 요구하는 공통된 설계 조건과 그 이면에 깔린 업계의 변화를 분석해봤다.

‘오더피킹’ 리드타임의 정교화

최근 유통업계의 물류 전략은 단순히 '빠른 배송'을 넘어 주문부터 출하까지의 전 과정을 얼마나 정교하게 통제하느냐에 집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오더피킹(Order Picking)'이다. 고객이 주문한 상품을 찾아 분류하고 포장대에 올리기까지의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물류의 핵심 역량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새벽·당일 배송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물류센터 내 작업 속도는 기업의 배송 약속 이행 능력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변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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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류신문, 사진=Gemini)

이러한 변화에 따라 자동화 설비 도입의 목적도 구체화되고 있다. 단순히 인건비를 줄이는 차원을 넘어 '공정별 소요 시간의 정밀한 단축'이 설비 설계의 제1원칙이 된 것이다. 기업들은 설비 업체에 단순한 기계 성능뿐만 아니라 주문부터 출하까지의 전 과정을 분 단위로 제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안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물류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아마존(Amazon)은 일찍이 오더피킹 시간 단축을 핵심성과지표(KPI)로 설정해 운영하고 있다. 과거 사람이 직접 물건을 찾아다니던 시절 약 60~75분이 소요되던 피킹 리드타임을 키바(Kiva) 로봇 등 로봇 도입을 통해 15분 내외로 대폭 줄인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단순히 물건을 빨리 찾는 것을 넘어 고객의 주문 마감 시간을 최대한 늦춰 배송 서비스의 경쟁 우위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국내 기업들이 내세우는 공통 설계 조건 중 하나는 ‘전 공정의 통합 리드타임'이다. 본지가 입수한 한 대형 업체의 RFP를 보면 공정별 소요 시간이 매우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주문 할당 이후 1시간 35분(95분) 내 포장까지 완료하고 분류를 포함한 전체 공정을 1시간 55분 이내에 끝내도록 설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물류센터 내부의 작업 속도가 단순히 센터 운영의 효율을 넘어 외부 배송 차량과 분 단위로 맞물려 돌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타이트한 시간 설계가 요구되는 배경에는 이커머스 특유의 주문 및 물류 흐름이 있다. 해당 RFP에 따르면 주문 인입은 전일 23시부터 당일 22시 59분까지 24시간 내내 이어지며, 특히 주간 직납 입고(08시~16시)와 심야 택배·냉장 입고가 교차로 진행되는 구조다. 설비 업체는 이처럼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입고와 적치, 피킹 공정 속에서도 정해진 리드타임을 100% 준수할 수 있는 설계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특히 선판매 상품의 경우 부분 할당으로 인한 생산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우선 적치' 등의 정교한 운영 로직이 요구된다. 전체 가동 시간의 평균치가 아닌 입고와 출고가 복합적으로 맞물리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병목 현상 없이 물동량을 처리할 수 있느냐가 설비 선정의 중요한 잣대인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조건들은 설비 업체가 통상적으로 제시해 온 '일일 평균 처리량' 지표만으로는 급변하는 유통 환경을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동화 설비는 단순한 기계를 넘어 배송 약속을 지키기 위한 핵심 타임라인의 일부가 됐다”며 “설비 업체는 단품 설비의 속도보다 인입부터 출고까지 이어지는 전체 공정의 흐름이 끊기지 않음을 데이터와 시뮬레이션으로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하드웨어 넘어 '소프트웨어' 전쟁

최근 유통업계가 설비 속도만큼이나 정교한 소프트웨어 설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천억 원을 들인 자동화 센터가 소프트웨어의 작은 오류 하나로 전체 가동이 멈추는 사고가 적지 않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리스크를 차단하기 위해 유통사들은 설비 업체에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MSA)' 도입을 요구한다. 이는 시스템의 각 기능을 독립적인 방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방식이다. 본지가 입수한 한 RFP를 살펴보면 설비제어시스템(WCS) 내의 기본 로직과 제어, 로그 수집 등을 논리적·물리적으로 분리해 설계할 것을 필수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특정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더라도 다른 공정은 지장 없이 돌아가는 회복탄력성을 설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글로벌 물류 로봇 시장을 선도하는 적지 않은 기업들 역시 스스로를 제조사가 아닌 '소프트웨어 기업'이라 지칭한다. 아마존의 '키바' 로봇이 강력한 이유는 로봇 자체의 힘보다 수천 대의 로봇이 서로 충돌 없이 최적의 경로로 움직이게 하는 제어 소프트웨어 역량에 있다. 국내 유통사들이 설비 업체에 고도의 IT 역량을 요구하는 배경에는 결국 물류의 경쟁력이 하드웨어의 힘이 아닌 소프트웨어의 '지능'에서 나온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에 따라 RFP는 24시간 365일 중단 없는 운영을 위한 ’서버 및 네트워크 이중화 방안‘을 또 다른 핵심 요구사항으로 담고 있다. 이는 단 1분의 설비 중단이 수억 원대의 기회비용 손실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설비 업체는 시스템의 일부가 고장 나더라도 스스로 우회 경로를 찾아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회복탄력성을 기술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설비 업체에 요구되는 기술적 지평은 하드웨어 설계를 넘어 고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영역으로 확장됐다. 설비 제조 역량만큼이나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유연하게 설계하고 장애 발생 시에도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는 IT 솔루션 역량이 입찰을 통과하기 위한 가장 높은 문턱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10년 보증 규정… '지속 가능 운영' 초점

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자동화 설비는 도입도 중요하지만 ’유지보수‘가 더 까다롭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설비 도입 후 6~7년 만에 부품이 단종되거나 특정 부품 가격이 폭등해 운영에 차질을 빚는 문제를 겪어왔다. 부품 하나가 없어 센터 가동이 중단되는 리스크를 막기 위해 유통사들은 설비 업체에 장기 운영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한 RFP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단종 부품에 대한 10년간의 공급 보증' 명시다. 이는 설비 업체에 단순 납품을 넘어 부품을 책임지고 공급할 수 있는 업체의 생존 가능성과 장기적인 공급망 관리 능력을 증명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사후 관리 기준 역시 강화됐다. 예비 준공 후 100일 이상의 현장 상주 기간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운영 시간 내내 설비와 IT 전문가의 현장 상주를 조건으로 걸었다. 이는 설비 중단 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자동화 센터의 컨베이어 라인은 공정 간 연결성이 높아 사소한 이물질 걸림 하나로도 후속 공정 전체가 연쇄적으로 마비될 수 있다. 장애 발생 후 외부 인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분당 수백만 원에서 최대 수억 원에 달하는 피크 타임의 기회비용 손실을 방어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는 현장에 전문 인력을 상시 배치해 장애 조치 시간을 단축하고 설비 가동률을 실시간으로 관리하겠다는 리스크 관리 전략이 반영된 것이다.

'안전이 곧 경영 리스크'…법적 리스크 제거 '필수'

안전 역시 설계 단계부터 고려해야 할 필수 조건이 됐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안전사고는 기업 경영의 중대한 리스크 관리로 부상했다. 입수한 모든 RFP에는 소방법과 산업안전보건법 등 각종 법규 준수를 설계 단계부터 엄격히 적용하도록 했으며 구체적인 피난 동선 가이드를 제시해 설비 배치의 효율성보다 작업자의 안전과 법적 리스크 제거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대형 화재와 인명 사고 이후 높아진 사회적 기준과 법적 책임이 설계 조건에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유통사가 제시하는 설계 조건들은 설비 납품을 넘어 24시간 중단 없는 비즈니스를 함께할 파트너를 찾는 과정과 같다고 느꼈다”며 “분 단위의 리드타임 사수와 고도화된 시스템 구조, 10년의 운영 책임은 이제 설비 기업이 갖춰야 할 종합 엔지니어링 역량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